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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향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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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묘, 경기전 제향 봉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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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선성군파대종회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1-10-14 13:28 조회19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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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묘(시조, 시조비), 경기전(태조고황제 어진전) 제향 봉행
2021.10.14
전주시 소재의 시조의 위패를 모신 조경묘와 태조 고황제의 어진이 봉안된 경기전에서의 제향이 봉행되었다. 코로나 여파로 중단된 제향이 재개되면서 처음으로 봉행된 제향이다.
대종회에서 제향에 치중회장, 인수 부회장이 참석하였으며, 집례에 상훈 전례상임이사, 찬례에 남정 전례위원이 봉무하였다.
<左 집례 상훈, 右 찬례 남정>
<조경묘 제향>


조경묘
조경묘는 전주 이씨의 시조인 이한과 그 부인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이한은 신라 때 사공이라는 높은 벼슬을 지냈고, 그 부인은 경주 김씨이다.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는 이한의 21대 후손이다. 조경묘는 조선 영조 47년(1771년)에 세워졌으며, 영조가 세손(정조)으로 하여금 쓰도록 한, 이한과 그 부인의 위패를 봉안했다. 철종 5년(1854년)에 경기전과 함께 보수해 오늘날의 모습을 갖췄다. 조경묘는 경기전과 함께, 전주가 조선왕조의 발상지임을 상징하는 곳이다.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6호.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풍남동에 있는 경기전(慶基殿)의 북쪽에 인접하여 있다.
이 것은 전주이씨의 발상지라 하여 전국 유생의 상소에 의하여 1771년(영조 47)에 창건된 것으로, 위패 ‘시조고신라사공신위(始祖古新羅司空神位)’와 ‘시조비경주김씨신위(始祖妣慶州金氏神位)’는 영조의 친필이다.
1854년(철종 5) 개수되었고, 동학혁명 때 경기전의 태조영정과 함께 위봉산성(威鳳山城)에 이안되었었다. 외삼문(外三門)ㆍ내삼문(內三門)ㆍ본전(本殿)과 그 좌우에 동무(東廡)ㆍ서무(西廡)가 있다. 내ㆍ외삼문은 맞배지붕에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내삼문 양쪽에는 제기고(祭器庫)가 연결되어 있다.
본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계 맞배지붕으로 전면에는 툇간을 마련하여 돌을 깔았고, 내부에는 북쪽벽에 단(壇)을 설치하여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관원은 영(令, 종5품)과 별검(別檢, 종8품) 각 1인을 두었으며, 묘관은 조정에서 선출하였다.

경기전
경기전은 조선왕조를 연 태조의 초상화, 즉 어진을 봉안하고, 제사를 지내기 위해 태종 10년(1410년) 지어진 건물이다. 전주, 경주, 평양 등의 어진 봉양처를 처음에는 어용전이라고 불리었는데, 태종 12년(1412년)에 태조 진전(眞展)이라 하였다가 세종24년(1442년)에 전주는 경기전, 경주는 집경전, 평양은 영숭전이라 각각 칭하였다.
경기전은 선조30년(1597년)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으나 광해군6년(1614년) 중건되었다. 경기전은 누구든 말에서 내려야 한다는 신성함을 표시한 하마비, 붉은 색칠을 한 홍살문, 외신문, 내신문 그리고 어진을 모신 정전으로 구성되어 있다. 왕실 사당임을 감안할 때 신문(神門)이라고 호칭되며 홍살물 안쪽 내·외신문의 세 문을 통과할 땐 '동입서출', 다시 말해 동쪽(오른쪽)으로 들어가 서쪽(왼쪽)으로 나와야 한다. 가운데는 태조의 혼령이 드나드는 '신도'이기 때문이다.
경기전은 조선 태조 이성계의 어진 봉안과 함께 전주사고(史庫)가 설치되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안고 있다. 경기전에 사고가 설치된 것은 1439년(세종21년)의 일이다. 경내에는 태조의 영정을 봉안한 경기전(유형문화재)과 그의 22대조이며 전주 이씨의 시조인 신라 사공공(司空公) 이한(李翰) 부부의 위패를 봉안한 조경묘 (肇慶廟·유형문화재)가 있다. 특히 태조 어진(국보)과 함께 현존하는 조선왕조 어진들이 모셔진 어진박물관도 자리하고 있다.
경기전이 오랫동안 관광객과 시민들로부터 사랑을 받아온 이유 가운데 하나는 도심속에 담긴 고풍스러운 모습과 우거진 수목 덕분이다. 경기전에는 다양한 수종의 나무가 있다.
<경기전>

<조경묘>
<태조고황제 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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