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산군 이말정(屛山君 李末丁) : 병산군은 증직으로 승헌대부(承憲大夫)에 올랐고 초계이씨와의 사이에 3자를 두었는데 장남은 지산군 이천수(知山君 李千壽)이며, 2자가 초계령 이팽수(草溪令 李彭壽), 3자가 홍산감 이만수(洪山監 李萬壽)이다. 지산군의 계자가 바로 순충적덕공신(純忠積德補祚功臣)으로 훈록된 이원군 이학정(利原郡 李鶴丁)이다. 이학정의 아들로 저명한 문헌공 이양원(李陽元, 1526~1592)이 있다. 병산군 이하 지산군, 이원군 산소는 선성군 산소 계하에 보존되어 있다.
이양원(李陽元)의 호는 노저(鷺渚)·남파(南坡),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퇴계의 문인이며, 어릴 적에 이중호(李仲虎)에게 수학하였고, 1556년(명종 11)에 알성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이 되었다. 이후 저작(著作)을 거쳐 1563년(명종 18) 호조참의가 되었다. 그해에 종계변무사(宗系辨誣使)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들어가 명나라의 『태종실록』과 『대명회전(大明會典)』에 태조 이성계의 아버지가 고려의 이인임(李仁任)으로 잘못 기록된 것을 바로잡고 돌아와 그 공로를 인정받았고, 이어 평안·충청·경기도 관찰사, 형조 판서, 대제학, 대사헌 등을 역임한 후에, 1590년(선조 23) 종계변무의 공로로 광국공신(光國功臣) 3등과 한산부원군에 봉해졌다.
이듬 해에 우의정으로 승진하였고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유도대장(留都大將, 임금이 서울을 떠났을 때 도성을 지키던 대장)으로 한강을 수호하다가 부원수 신각(申恪)과 함경도 병마절도사 이혼(李渾)의 군사와 합세하여 양구 해유치(蟹踰峙)에서 적군을 맞아 대승을 거두었다. 그런데 이양원은 당시 의주에 피난 중이던 선조가 요동으로 건너갔다는 와전된 소문을 듣고, 왕을 제대로 보필하지 못함을 분통하게 여겨 단식한 지 8일 만인 1592년(선조 25) 7월 1일 67세의 나이로 졸하였다. 경기 양주 백석읍 연곡리에 해유령전첩비가 있고, 충현사에 신각과 함께 제향되었다. 시문집으로 『노저유사』가 1940년 11대손 이능화에 의해 발간되었다. 시 148편, 시조 1수 등 시와 가사는 청구영언에 수록되어 있다.
이양원의 묘소는 충남 당진 대호지면 송전리 산 61-23번지에 있다. 묘소 앞에는 이양원이 죽은 지 100여 년이 지난 후에 고손자인 이우정(李宇鼎)이 세운 묘비가 남아 있고(예문관 대제학 권유(權愈) 찬, 호조판서 오시복(吳始復) 서), 1998년에 건립하여 이양원의 신위를 배향한 문헌묘(文憲廟)가 있다. 이양원의 아들 이시경의 충신정려가 있으며 1993년 지방문화재 제4호로 지정받았다.
병산종중 임원 및 대의원 명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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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 위 |
성 명 |
문 중 |
代 |
종 손 |
商根 |
鷺渚 |
18 |
고 문 |
政和 |
鷺渚 |
15 |
商熙 |
鷺渚 |
18 |
|
商福 |
同福 |
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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商權 |
鷺渚 |
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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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 장 |
기로 |
노저 |
17 |
부회장 겸 재정 |
상은 |
동복 |
18 |
감 사 |
영신 |
동북 |
17 |
총무이사 |
준우 |
동복 |
19 |
전례이사 |
길중 |
노저 |
17 |
이 사 |
健中 |
鷺渚 |
17 |
成中 |
鷺渚 |
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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商九 |
鷺渚 |
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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商仁 |
鷺渚 |
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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商奉 |
鷺渚 |
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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致雨 |
鷺渚 |
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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成雨 |
鷺渚 |
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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昌信 |
同福 |
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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商源 |
同福 |
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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商潤 |
同福 |
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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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종회 임원, 대의원은 당연직 이사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