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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전주이씨 시조의 휘(諱)는 한(翰)이요, 호는 견성(甄城)이다. 신라의 사공(司空)벼슬을 지냈다.
배위(配位) 경주김씨는 신라 태종무열왕의 10세손 군윤(軍尹) 김은의(金殷義)의 딸이다.
공은 총명하시고 재질도 뛰어나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았다. 15세에 한림원(翰林院)에 들어가 지극한 효성으로 부모를 섬겼다. 그래서 동요에 "오얏나무 밑에 반드시 왕기가 서려 있다"라고 하였다.
18세 때는 문장이 비범하고 성품이 인자하여 탁월한 재능과 더불어 기품이 널리 떨쳤다. 명성이 조정에까지 떨쳐 신라 문성왕(文聖王)이 사공에 임명하니 정치를 하신지 1년 만에 나라가 태평하여 온갖 벼슬아치들이 다 화합하고 온 백성이 모두 즐겼다. 그래서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의 10세손 군윤(軍尹) 김은의(金殷義)의 딸로 아내를 삼게 하니 이분이 바로 경주김씨 이다.<완산실록(完山實錄)에서>
영조가 조경묘를 세운 경위를 기록한 책 "어제수덕편전" |
전설에 전주 조경단에서 나왔다는 지석(誌石)이 현재 전라북도 문화재로 지정돼 보존되어 내려오는데, 그 돌 앞면에 "천보십삼재 구척하(天寶十三載 九尺下)"라고 새겨져 있다.
시조공의 졸년은 "천보" 13년이다. 천보는 중국 당나라 현종(玄宗)의 연호로 서기 742∼755년에 해당된다. 따라서 `천보 13년'은 서기 754년이요, 신라 경덕왕(景德王) 13년이다. 이 지석대로라면 시조할아버지의 졸년은 서기 754년이다. 그러나 향년(享年)을 알 수 없으니 출생년은 알 길이 없으나 신라 문성왕때 사공을 지내셨으니 그 이전에 출생하셨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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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이후 아들 자연(自延)이 시중(侍中)을 역임했고 손자 천상(天祥)은 복야(僕射)를 지냈으며, 증손 광희(光禧)는 아간(阿干)을, 현손(玄孫) 입전(立全)은 사도(司徒)를 역임하는 등 신라에서 벼슬을 지내다가 15세손 용부(勇夫)에 이르러 고려조(高麗朝)에서 흥무위 대장군(興武衛大將軍)을 역임하였다.
그 후 그의 아들 린(璘)이 내시집주(內侍執奏)로 시중(侍中) 문극겸(文克謙)의 딸에게 장가들어 17세에 양무(陽茂 : 좌우위 중랑장을 역임)를 낳았으며, 상장군(上將軍) 이강제(李康濟)의 딸에게 장가들었던 양무는 18세에 안사(安社)를 낳으니 이분이 바로 이태조(李太祖)의 고조부(高祖父)인 목조(穆祖)이시다.
호방(豪放)한 성품으로 신망을 받았던 목조는 처음에 전주(全州)에 살다가 산성별감(山城別監)과 사이가 나빠 강릉도 삼척현(江陵道三陟縣)으로 이거(移居)하였으나 공교롭게도 강릉도의 안렴사(安廉使)로 임명된 자가 바로 그 산성별감이어서 목조는 다시 가족을 데리고 삼척을 떠나 함길도 덕원(咸吉道德源)에 정착하였다가 원(元)나라에 귀화하여 알동(斡東 : 경흥부의 동쪽 30리에 있었다.)땅으로 이주(移住)하여 원주민 5천호(五天戶)를 다스리는 다루하치(達魯花赤 : 원나라 벼슬 제도)가 되니 이때가 고려 고종(高宗 : 제 23대 왕, 재위기간 : 1213∼1259) 조(朝)였고,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에 동북 방면 사람들이 모두 목조에게 쏠려 쫓으니 이씨 조선 왕업(李氏朝鮮王業)의 시초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목조로부터 천호(千戶) 벼슬을 세습한 익조(翼祖 : 이행리)는 원나라 세조(世祖)를 도와 왜인정벌에 참전했고, 원나라에 귀화해 있으면서도 마음은 항상 본국에 있었다. 그가 충렬왕(忠烈王)을 공손히 뵈오니 왕이 말하기를 “그대는 원래 본국에서 벼슬하던 집안이니 어찌 근본을 잊을 것인가. 지금 그대의 거동을 보니, 마음이 본국에 있는 것을 알겠다"고 하였다.
익조가 부인 최비(崔妃)와 더불어 낙산 관음사(洛山觀音寺)에서 기도하여 낳았다는 탁조(度祖)의 장자 완창대군(完昌大君) 자흥(子興)은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증직(贈職)되었고, 차자 환조(桓祖) 자춘(子春)은 원나라 총관부(摠管府)가 있던 쌍성(雙城)의 천호(千戶)를 지냈으며, 셋째인 완원대군(完原大君) 자선(子宣)은 완산백(完山伯)에 봉해졌다.
1315년(고려 충숙왕2)에 출생했던 환조(桓祖) 자춘(子春)은 공민왕(恭愍王)의 북강(北彊) 회수정책에 내응하여 쌍성을 함락시켜 함주(咸州) 이북의 땅을 회복하는데 결정적인 공을 세우고 대중대부 사복경(大中大夫司僕卿)이 되어 저택을 하사 받았으며, 판군기감사(判軍器監事)로 서강병마사(西江兵馬使)를 겸하여 왜구(倭寇) 침입을 토벌하고 삭방도만호 겸 병마사(朔方道萬戶兼兵馬使)에 임명되어 함경도 지방을 다스렸다.
슬하에 3남 1녀를 두었던 환조의 장남 원계(元桂)가 1361년(공민왕10) 홍건적(紅巾賊)이 침입했을 때 박주(博州)에서 승전하고 개경(開京)을 탈환하는데 공을 세워 2등 공신에 책록 되었고 우왕(禑王) 때 원수(元帥)가 되어 왜구를 토벌했으며, 요동(遼東) 정벌 때는 팔도도통사 조전원수로 이성계(李成桂)의 휘하에서 공을 세웠다. 환조의 둘째 아들 화(和)는 조선(朝鮮)이 개국되자 일등공신으로 의안백(義安伯)에 봉해졌으며, 두차례 왕자의 난을 평정하여 태종(太宗) 때 영의정(領義政)에 올라 대군(大君)에 진봉되었다.
1392년(태조1) 7월 16일 송경(松京) 수창궁(壽昌宮)에서 즉위한 태조(太祖)로부터 마지막 임금인 순종(純宗)에 이르기까지 27명의 왕(王)이 승계하면서 519년간 지속한 조선왕조(朝鮮王朝)의 기초를 세웠던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는 환조(桓祖) 자춘(子春)의 셋째 아들이며, 시조 사공(司空) 이 한(李 翰)의 22세손이다.
외교정책으로서 사대교린주의(事大交隣主義)를 채택하고, 문화정책으로서 숭유배불주의를, 경제정책으로서 농본민생주의(農本民生主義)를 건국(建國) 이념으로 내세워 왕권 중심의 권력구조를 확립하여 한국(韓國) 최대의 벌족(閥族)으로 발전해 전주이씨(全州李氏)는 대소 125여 파(派)로 갈라져서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시조로부터 목조대왕(穆祖大王)의 아버지인 양무장군(陽茂將軍)까지를 선원선계(璿源先系)라 하고, 목조대왕으로부터 왕통계(王統系)인 순종황제까지를 선원세계(璿源世系) 또는 선원본계(璿源本系)라 하며, 목조대왕의 왕자파(王子派) 이후 순종황제의 왕자군(王子君)까지의 각 파를 선원파계(璿源派系) 또는 선원속계(璿源續系)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의 시조로부터 17세 양무장군까지의 직계와 방계의 3파 곧 시중공파(侍中公派) · 평장사공파(平章事公派) · 주부공파(主簿公派)는 모두 선원선계에 속한다.
선원세계는 추존왕 4대와 태조고황제부터 순종황제까지 20세를 합쳐 24세의 역대왕의 세계를 의미한다.
그리고 목조대왕의 5왕자로부터 장조의 3왕자군까지 도합 125의 파계가 있었으나 무사(無嗣)의 군파가 있어 현재는 105여 파로 분리되고, 2000년 5월 현재 사단법인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에 등록한 파종회는 92개 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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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전북 도청 소재지인 전주시는 본래 백제의 완산(完山 : 比斯我 · 比自火)으로 554년(백제 위덕왕 1) 주를 두어 완산주(完山州)라 하였다가 565년(위덕왕 11) 에 주를 폐하였다.
백제가 신라에게 망한 뒤인 685년(신라 신문왕 5)에 주를 두어 다시 완산주로 하였다가 757년(경덕왕 16)에 지금의 전주로 개칭하였다. 그 후 효공왕 때 견훤이 이곳에 도읍을 정하고 후백제라 칭하더니 936년(고려 태조 19) 후백제의 신검(神劒)을 토벌하고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로 개칭하였다가 940년(태조23년) 다시 전주로 환원하였다. 993년(성종 12) 승화 절도안무사(承化節度安撫使)로 개칭하였다가 995년(성종 14) 12절도사를 둘 때 순의군(順義軍)이라 부르고 강남도(江南道)에 예속되었다.
1018년(현종 9) 안남대도호부로 승격, 뒤에 다시 전주목(全州牧)으로 개칭되었다. 1355년(공민왕 4) 원나라 사신 야사불화(野思不花)를 거두었던 곳이라 하여 강등되어 부곡(部曲)이 되었다가 1356년(공민왕 5) 다시 완산부로 복구 되었다. 1392년(태조 1)에 조선 태조의 본관이므로 완산유수부(完山留守府)로 승격, 1403년 (태종 3) 전주로 환원, 부윤(府尹)을 두었고 세조 때에는 진(鎭)을 두었다. 그 뒤 줄곧 전라도의 감영이 이곳에 있었다.
1895년(고종 32) 군이 되고 전국을 13도로 개편한 후 전북 도청 소재지가 되었다. 1935년 부로 승격, 1949년 시로 개칭되어 오늘날에는 인구 30만의 도시가 되었다. 그래서 첫 이름이 완산(完山)이었는데 나중에 전주(全州). 견성(甄城)이라고도 하였다. 완산은 원래 전주에 있는 산 이름이었다. 전주부의 남쪽 3리에 있었던 작은 산으로 고덕 산(高德山)으로부터 갈라진 산이었는데, 전주의 안산(案山)으로 남복산(南福山)이라고도 하였다.
또 부의 북쪽 10리에 있으면서 마이산(馬耳山)으로부터 갈라져 내려온 전주의 진산(鎭山)인 건지산(乾止山)과 마주 바라보이던 산이었다. 따라서 우리 전주이씨는 완산이씨(完山李氏)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대체로 전주이씨라 부르고 간혹 기호에 따라 완산이씨라고 기록할 때도 있다.
이 전주는 조선왕조의 시조가 탄생한 곳이다. 그래서 이 전주는 우리 전주이씨와 절대적인 관계에 있고, 전주이씨를 빼놓고 전주를 논할 수는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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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肇慶)”이란 말은 ‘경사(慶事)가 시작된다’는 뜻으로 기쁨이 비롯되는 우리 전주리씨 시조의 단(壇) 이름으로만 쓰인다. 조경단은 우리의 시조 한(翰) 할아버지의 묘역(墓域) 이름이다. 다만 묘가 있는 곳이 불확실하여 단을 쌓아 놓고 제향을 지내니 조경단이라 하는 것이다.
이 조경단은 바로 전주의 진산인 건지산 왕자봉(王字峯) 끝에 모셔져 있다. 고종태황제가 친히 지은 조경단비음기(肇慶壇碑陰記)에 이렇게 적혀 있다.
우리 나라 선원보략(璿源譜略)>에는 시조의 묘소에 대한 기록이 없지만 전주는 곧 우리 왕실의 시조가 탄생한 곳이다. 경기전(慶基殿) 전의(殿儀)에는 전주부 북쪽 10 리에 건지산이 있으니 곧 시조 사공공의 묘소가 있다 하였고, 읍지(邑誌)에도 `건지산에 사공공의 묘소가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태조고황제가 나라를 연 직후에 그 산을 봉하여 지키게 하고, 전라도 책임자에게 잘 받들어 보살피도록 명하였다. 그러다가 영조대왕 때 이르러 실제로 묘역의 경계를 조사해 보았으나 알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근방의 백성들의 무덤을 파내게 하고 감독관과 산지기를 두어 경계를 확정하고 절대로 벌목을 못하게 하였다.
전의와 읍지에 이렇게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고 태조고황제와 영조대왕의 조상을 받들어 모시는 그 정성은 문헌으로 가히 징험될 수 있으되 지금에 와서는 아득하여 묘소를 알 길이 없으니 참으로 서글플 따름이다. 아, 이제 봉분을 높이 쌓아 올리고 싶으나 그 일이 극히 어려운 일이라 열성조께서 미쳐 이루어 놓지 못한 것이리라.
이에 금년 봄에 재신(宰臣)을 보내어 왕자봉(王字峯) 아래 진좌(辰座) 언덕을 살펴보려 하였더니 전설에 내려오는 대로 아래위로 무덤의 형체가 있다 하므로 사방으로 산의 경계를 정하는데 정조대왕은 산을 봉하여 수호하던 절차에 따라 양지척(量地尺)으로써 땅을 측정했다.
동서로는 3,360척이요 남북으로는 3,520척이다. 또 영건청(營建廳)을 설치하도록 명하여 산소 형체의 앞에다 제사지낼 단을 쌓고 “조경단”이라 부르라 하였다. 그리고 해마다 제사지내는 예를 올리게 하고 지키면서 받드는 관원 두 사람을 두어 모든 절차를 각 원(園)의 예 에 따르게 하니, 대저 우러러 아득하게 넓음은 하늘이요, 단을 쌓아 제사를 지냄에는 제기와 제수가 제 자리를 차지하여 그 경건한 정성이 한결같을 것이로다.
선조의 시신이 묻힌 곳이 이곳이니 만약 산 전체를 묘역으로 봉한다면 어디에다 사모하는 정을 부치리요? 지금부터 자자손손 억만년 영구히 전례(典禮)가 되리로다. 아, 짐(朕)이 어찌 이런 전례를 만들었다고 감히 말하겠는가? 열성조께서 겨를이 없어 실천하시지 못했던 것을 오늘을 기다려 이어 행 한 한 가지 일일 뿐이로다.
완산(完山)은 전주부(全州府)의 남산이요, 우리 왕실의 관향이다. 그래서 전부터 묘석이 있었는데 모두 마모되어 겨우 7자만 볼 수 있으니 `完山'과 `己亥五月立' 뿐이다. 금년은 곧 기해년이요, 단을 쌓아 마치는 일도 5월이다. 하늘의 이치로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 것도 때가 있어 꼭 부합함이 이와 같도다. 오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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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비문은 고종황제가 친히 짓고 당시의 명필 윤용구(尹用求 : 1853∼1939)가 썼다.
이로 보면 우리의 시조할아버지의 묘가 이곳에 있었고 태조고황제도 관심을 기울여 묘역을 수호케 하였으며 특히 영조대왕은 대대적으로 정화 작업을 하였으나 그때는 이미 시조공의 묘소를 분간할 수 없게 되었었다.
그 뒤 정조대왕도 산소 보존을 위하여 사방경계를 정하는 등, 여러 열성조가 선조 묘역 수호 보존에 힘을 썼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고종황제가 본격적으로 정화사업을 하여서 묘역을 넓혀 경내를 넓히고 단을 쌓아 “조경단”이라 이름을 붙이고 비와 비각도 세웠다.
그 때까지 내려오던 비가 있었으나 비문이 전부 풍마우세로 닳아 버리고 7자만 남았다는 내용도 알 수 있다.
그러나 1899년(고종 광무 3) 4월 8일에 묘소 앞에 조경단을 쌓고 5월 25일에 묘소 위에 흙을 더했다고 <선원계보기략>에는 기록되어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고종 때까지는 시조 할아버지의 묘소를 알고 있었다고도 볼 수 있다.
원래 조경단의 영역은 광복전까지 450 정보 곧 135만평이나 되었었다. 그러나 광복 후 전북대학교 등 각종 관서의 부지로 거의 뺏기고 지금은 묘역과 재실을 합쳐 10만평도 남아 있지 않다.
또 조경단 영역은 현재 약 9천평 정도로 둘레의 담을 쌓은 것도 1972년 당시 환의(桓儀) 종약원 이사장이 전북도지사로 있었고, 해권(海權)종현이 부지사로 있을 때 당시 대통령에게 간청하여 예산을 얻어 지금과 같이 정화했다. 1976년 6월 23일 전라북도 기념물 제3호로 지정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