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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자료 경기전(慶基殿)

2015.03.16 05:29

강화영감 조회 수:340

경기전(慶基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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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대한조경단비(大韓肇慶壇碑)

 

 

1899년 조경단(肇慶壇)을 조성하면서

고종이 친히 써서 건립한 비(碑)로, 높이가 4m에 이르는 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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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어좌(御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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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태조어진봉안반차(太祖御眞奉安班次)

 

 

어진봉안반차(御眞奉安班次)는 고종 9년(1872년)의

"어진이모도감의궤(御眞移摸都監儀軌)"와 헌종 4년(1838년)

"영정모사도감의궤(影幀模寫都監儀軌)" 및 조선시대 어진관련 의궤와

"국조의례의(國朝五禮儀)"를 비롯한 예서(禮書)를 두루 참고하여

 

반차도(班次圖)를 중심으로 분석하고, 인물(人物), 복식(服飾),

의물(儀物), 여연(輿輦), 의례(儀禮) 등을 세밀히 고구(考究)하면서

추사(追寫)하여 행렬구성(行列構成)을 재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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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태조어진봉안 반차도(太祖御眞奉安 班次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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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신연(神輦)

 

 

1771년 조경묘에 위패를 봉헌할 때 사용했던 가마이다.

 

둥근 지붕 형태의 가마이며, 꼭대기에는 호리병 문양의

정자(頂子)를 장식하였다. 4면에는 난간을 높게 설치하고 사방에 휘장을 둘렀다.

 

내부에는 흑장궤가 좌우로 기울어지지 않도록 나무를 끼워 세웠고,

그 아래에는 흑장궤가 쉽게 움직일 수 있도록 윤여축(輪輿軸)을 설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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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향정(香亭)

 

 

"위판조성도감의궤"의 반차도에 나와 있는

향정과 모양이 같아 1771년(영조 47년)에 조경묘의 위패를

봉안(奉安)할 때 사용했던 향정으로 추정된다.

 

4면이 개방되어 있고 합뒤로 합각면이 보이는

팔작지붕을 취하고 있다. 지붕은 녹색으로 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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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태조 이성계의 가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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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조선왕실 시조의 사당(조경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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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조선왕실 시조의 묘역(조경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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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記略)

 

 

대표적인 조선왕실 족보로 1681년(숙종 7년)에

처음 간행되어 1931년까지 발간되었다. 시조 이한부터

기록되었으며, 왕의 내외손 6대까지 수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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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태조실록(太祖實錄)

 

 

"태조실록" 1책, 총서에 태조의 가계가 수록되어 있다.

조선왕조의 왕실 가계에 관한 첫 공식적인 기록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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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북도능전도형(北道陵殿圖形)

 

 

함경도 각지에 있는 목조, 익조, 도조, 환조를

비롯한 태조의 내외 팔고조 각 능과 선원전, 경흥전,

함흥본궁, 연흥본궁 등을 그린 채색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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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어제수덕전편(御製樹德全篇)

 

 

영조가 조경묘 창건의 의미를 밝힌 것이다.

 

왕업의 기원을 시조 이한까지 끌어 올리고,

조선왕조는 시조부터 오랫동안 덕을 쌓은 결과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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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영조어필(英祖御筆)

 

 

영조는 조경묘 창건을 축하하기 위해 전주이씨와

경주김씨를 대상으로 과거시험을 베풀었다. 이를 완경과라고 하는데,

이 시험에 급제한 김성갑에게 영조가 내린 어필이다.

 

"네가 누구의 후손인고, 어찌 이제 왔는가"라고 쓰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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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자만동 금표(滋滿洞禁標)

 

 

1900년대에 조선 고종의 명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전주 이씨의 발상지인 자만동(현재의 전주시 교동 이목대)

일대에 대한 출입 금지를 알리는 표시석 이다.

높이 62cm에 폭 31cm, 두께 15cm의 화강암에 글이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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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조경묘 경기전 도형(肇慶廟 慶基殿 圖形)

 

 

조경묘와 경기전의 건물 배치를 그려 놓은 지도이다.

 

조경묘와 경기전이 지금과 달리 별도의 공간으로 되어 있고,

입구가 서편으로 되어 있으며, 정전과 정묘 앞에 드무가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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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조경묘 참봉 칙명(肇慶廟 參奉 勅命)

 

 

1903년(광무 7년) 궁내부에서 9품 종사랑 유관현을

조경묘 참봉서판 8명 가운데 한 명으로 임관한다는 내용의

임용장이다. 칙명은 대한제국 이후 국왕이 신하에게

관직과 시호 등을 내려주는 문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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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조경묘 시위유사 첩(肇慶廟 侍衛有司 牒)

 

 

1886년(고종 23년) 조경묘 묘관이 이규찬을

조경묘 시위유사로 임명하면서 발급한 임용장이다.

 

 아마도 이규찬은 전주이씨로 전주 일원에 살았을 것이다.

 

시위유사는 조경묘를 수호하는 역할을 하며,

종실로 구성된 충의군 중에서 선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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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조경묘 금화군 준호구(肇慶廟 禁火軍 准戶口)

 

 

1807년(순조 7년) 전주부에서 조경묘 금화군

박종득(29세)에게 발급한 준호구이다. 그는 아내 이씨(23세)와 함께

아버지(68세)를 모시면서 살고 있었다. 금화군은 화재방지 등 여러 잡일을 담당한다.

 

준호구는 관청에서 개인의 호적사항을 증명해 주는 문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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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어제칙유(御製飭諭)" 현판(縣板)

 

 

조경묘 재실에 걸려 있는 편액으로, 1749년에 영조가

제례에 관해 내린 것이다. 경기전 관리물과 제관들에게 내린 것이지만,

조경묘 관리와 제관들에게도 같이 적용 되었던 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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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조경묘 춘추향사 축식 의궤(肇慶廟 春秋享祀 祝式 儀軌)

 

 

고종 때 제작된 축문형식으로 조경묘에서

춘추향사를 지낼 때 제사에 활용하기 위해 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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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조경묘 채운선(肇慶廟 彩雲扇)

 

 

신위가 봉안된 조경묘 정묘 안에 배치된 의장 중 하나이다.

1872년(고종 9년) 조경묘를 중수하면서 채운선을 새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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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조경단 창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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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조경단 제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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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건지산도형(乾止山圖形)

 

조경단과 재실이 위치한 건지산을 그린 채색 도형이다.

주위 광범한 지역에 토성을 축조하고 그 안에 다수의 촌락과 전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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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박해창 간찰(朴海昌 簡札)

 

 

남원 몽심재의 주인 박해창이 한양에서 비서감랑 벼슬을 할 때

아버지 박주현에게 보낸 간찰이다. 여기에 궁내부 대신 황교 대감이

조경단을 봉심하러 가는 기사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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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향정(香亭)

 

 

향정은 향로와 향합을 싣고 가는 조그만 가마로,

향정자라고도 한다. 이 향정은 1872년 태조어진을 이안할 때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4면이 개방 되어 있으며,

 

지붕 아래에는 공포를 장식하였다.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구성한 후 녹색으로 칠하였으며,

추녀 하부에는 금칠을 한 풍경을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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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신연(神輦)

 

 

신연은 어진의 이안이나 봉안에 사용했던 가마를 말한다.

지붕은 둥근 형태이며, 꼭대기에는 호리병 모양의 정자를 장식하였다.

 

사면에 난간을 설치하고 그 판에 금색으로 용무늬를 그려 놓았다.

몸체 사방으로는 주렴을 늘어뜨렸고, 그 위에는 전후 각 3개씩 좌우에

각6개씩 총 18개의 낙영을 장식하였다. 문은 앞면에만 달아 어진을

봉안한 흑장궤를 앞에서 싣고 내릴 수 있게 했으며,

 

가마채의 끝 부문 및 몸체와 접합된 부분에도 각각 용머리를 장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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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가교(駕轎)

 

 

가교는 조선시대 고간의 행차에 사용하던 가마로,

1872년 태조 어진을 봉안할 때 어진 벙안 책임자인배왕대신이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형태는 연과 마찬가지로 2개의 가마채 위에 목교를

안ㅈ혔으며, 내부에는 교의를 설치하고 몸체판에 금색으로 연화문을 그렸다.

 

익장에는 전후좌우에 30개의 낙영을 달았다.

가마채의 끝 부분 및 몸체와 접합한 부분에 각각 용머리를 장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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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채여(彩轝)

 

 

채여는 왕실의식 때 귀중품을 옮겨 싣는데 쓰던

교자와 비슷하게 만든 가마이다. 이 채여는 조경묘의 위패를 봉안할 때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향정자와 구보가 비슷한데,

 

가마채 아래에 운족을 조각하였고 지붕은 집모양처럼 하되

아청색 면포를 덮고, 그 위에 주칠한 정자를 설치하였다.

처마에는 기와를 상하로 장식하였고 사면에는 정자를 설치하여

안팎으로 종이를 붙여서 모란을 그려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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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명견루 현판(明見樓 縣板).

 

 

1734년(영조 10년)에 전라감사 조원명이

전주부성을 수축하면서 성문 위 3층 문루를 "명견루"라 이름 하였다.

 

조현명이 전주성을 수출할 때 백성들이 이를 반대하고

조정에서 논란이 일어 공사가 중잔 되었는데, 축성 재원의

출처와 농민들의 유로 사역을 자세히 적어 보고함으로서

영조의 특명으로 공사가 지속될 수 있었다.

 

그래서 현군인 영조의 명견이 있었기에 축성 공사가

가능하였다는 뜻으로 "명견루"라 이름 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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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태조실록

1335~1408 ? 복제(전주사고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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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류관현을 조경모 참봉에 임명한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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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목재받침과 석재용두

 

 

어진의 균형을 바로잡기 위해 어진의 목측을

놓았던 탁자와 어진의 목축을 받치던 용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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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제기(祭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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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제례복(祭禮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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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용문암막새(雲龍文平瓦當)

 

 

경기전 서편 발굴 과정에서 용의 발톱이

5개인 와당과 함께 3개인 와당 조각이 출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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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영정모사도감의궤(影幀模寫都監儀軌)

 

 

창덕궁 선왕전에 태조어진을 봉안하기 위한

영흥, 준원전의 태조어진 모사 과정을 기록한 의궤이다.

책 뒤편에 어진을 이안하던 행렬도를 그린 반차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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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정약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