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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릉(厚陵)

     후릉(厚陵)은 조선 2대 정종대왕(定宗大王)과 그의 비 정안왕후(定安王后) 김씨의 능으로 "경기도 개풍군 흥교면 흥교리 소재(현 개성시 판문군 영정리)에 있다. 후릉은 1412년(태종 12) 6월 25일 정안왕후가 58세의 나이로 승하하여 후릉에 안장됐고, 7년 뒤 정종이 승하하자 조선의 왕릉 가운데 최초로 왕과 왕비의 봉분을 나란히 난간석으로 두 봉분을 연결하여 만든 쌍릉 형식의 능이다.

고려 공민왕릉의 형식을 따라 봉분에는 12면의 병풍석을 두르고 있으며, 석마를 동원한 문인석과 무인석을 각각 2쌍 씩 배치하였다.

후릉 옆면

후릉 정면

  문인석.무인석.석마

 

     후릉제향(厚陵祭享)

     정종과 정안왕후 경주김씨(定安王后 金氏.1355년~1412년)의 후릉이 북한땅 "개풍군 흥교면 흥교산"에 있어 매년 양력 10월 24일에 "경기도 구리 동구릉(東九陵) 태조 건원릉 정자각"에서 15군파(君派)의 후손들이 모여 함께 기신제향{忌辰祭享}을 지내고 있다.

 

 

     정종(定宗)

    조선 2대 임금 정종은 1357년(고려 공민왕 6) 음력 7월 1일 함흥에서 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 이성계(李成桂) 안천부원군(安川府院君) 한경(韓卿)의 딸, 신의왕후 한씨(神懿王后 韓氏) 사이에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조선 건국 후 제2차 왕자의 난이 수습된 뒤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새롭게 건국한 조선의 수도 한양에서의 골육상쟁, 즉 제1차 왕자의 난을 상기하여 예전의 수도인 개경으로 환도하였다.

    동생 정안군을 왕세제로 삼고 왕족, 권신(權臣) 등이 양성하던 사병을 폐지하여 삼군부에 편입시켰다.
또한 관제를 개혁하고, 한양의 5부에 각각 학당을 설립하는 등의 업적을 이뤘다.

    태종에게 왕위를 양위하고 개성 인덕궁에 거주하며 생활을 하다 1419년(세종 1) 왕위에서 물러난 지 19년만에 63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태종에게 선양한 뒤에는 아우 태종이 인문공예 상왕(仁文恭睿 上王)으로 호(號)를 올렸고, 사후 조선 중후기까지 시호인 공정대왕(恭靖大王)으로 불리다가 숙종 때 정식으로 묘호와 시호를 올려 정종공정의문장무온인순효대왕(定宗恭靖懿文莊武溫仁順孝大王)으로 불리게 됐다.

이름 휘(諱)는 경((), 자는 광원(光遠), 초명은 방과(芳果), 묘호는 정종(定宗)
생몰연도 : 1357년 ~ 1419년
재위기간 : 1398년 ~ 1400년

    정안왕후(定安王后) 김씨

    정안왕후 김씨(定安王后 金氏, 1355년 ~ 1412년)는 조선 정종의 왕비이다. 별호는 덕비(德妃), 시호는 온명장의정안왕후(溫明莊懿定安王后)이다.

월성부원군 김천서(月城府院君 金天瑞)의 딸로 본관은 경주이다. 조선 최초의 왕대비로 안정왕후(安定王后)라고도 한다
1398년(태조 7) 영안군이 세자가 되면서 세자빈이 된 뒤 덕빈에 책봉되었다가 정종이 즉위하자 덕비로 진봉되었다.

1400년(정종 2) 정종이 세제 방원에게 양위하자 순덕왕태비(順德王大妃)의 존호를 받았다.

    온화한 성품의 소유자로 공손하고 검소한 마음을 지녔다고 한다. 또한 덕행으로서 아랫사람을 다스렸고, 친족들과 친교를 두텁게 했다고 한다. 소생은 없으나 투기하지 않고 후궁과 그녀들의 자식을 자매와 친자식으로 키워 화평을 이루어 왕자와 공주 모두 자손이 번성하여 이름난 재상을 많이 배출했다.

    1412년(태종 12) 6월 25일 인덕궁에서 58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생몰연도 : 1355년 ~ 1412년

 

     정종(定宗)의 치적

   정종은 공민왕 6년(1357) 7월 18일(음력 7월 1일)에 조선 태조 이성계와 안천부원군(安川府院君) 한경(韓卿)의 딸, 신의왕후 한씨 사이에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따사롭고, 공손하며 어진 성품으로 자랐는데 용략(勇略)이 뛰어나 아버지 이성계 장군을 따라 출정하여 공을 세우곤 했다.

1377년 아버지가 지리산에 출몰하는 왜구 토벌에 나서자 여기에 참가하여 큰 공을 세웠고 간신 염흥방을 국문하는 기술이 빼어남에 중앙 정계의 주목을 받았다.

또한 1389년 왜구가 해주까지 침략하였을 때 목숨을 걸고 수도 개성을 방어함으로써 그 이름을 세상에 떨쳤으며 1390년에도 충청도 예산에서 왜구를 생포해 주요 정보를 캐내는 능력을 과시하였다.

특히 아버지 이성계 장군이 위화도에서 회군을 단행함에 따라 당시 용호군 좌장군 이방과는 민첩하게도 평양을 빠져나와 이성계 진영에 합류해 회군성공에 절대수훈을 세웠다.

그 뒤로도 양광도까지 침입한 왜구를 격퇴하여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에 임명되었던 것이니 젊은 날의 정종은 승승장구하는 욱일승천의 용과 같은 기세를 보인 무장이었다.

1398년 9월 5일부터 1400년 11월 11일까지 그 짧은 동안에 정종은 많은 일을 했다.

먼저 신하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개경(開京)으로 천도하고, 인사 청탁 관행인 분경(奔競)을 금지하는 분경금지법을 시행하고, 노비변정도감(奴婢辨定都監)을 폐지했다가 복설, 혁파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지배세력에 의해 강제로 노비가 된 양인을 구제해 나가는 한편 신하들의 세력도 약화시키는 효과를 거두었다.

또한 문신(文臣)을 집현전(集賢殿)에 모이도록 하여 무신(武臣)의 힘을 견제하였으며 승려의 민가 출입을 금하고 한성(漢城)에 오부학당(五部學堂)을 설치하여 국정교학으로 채택한 유학을 강력히 확산시켜나갔다.

왕족.권신(權臣)등이 양성하던 사병을 폐지하여 삼군부(三軍府) 에 편입하고,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를 의정부로, 중추원을 삼군부로 고첬다.

정종은 집권초기 신하의 나라가 아닌 왕권의 나라를 구축하면서 무력통치가 아닌 문치시대임을 천명한 영민한 왕이었다.

 

1) <정종상왕 존호 옥책>, 《선원보감》1권, 계명사, 1989. 194쪽.
2) 이긍익, <정종조 고사본말>, 《국역연려실기술》 1권, 민족문화추진회, 1966. 175쪽.
3) 이긍익, <정종조 고사본말>, 《국역연려실기술》 1권, 민족문화추진회, 1966. 175쪽
4) SmartK(참조)

     후릉은 북쪽 산을 뒤로 하고 남쪽 냇가와 남산을 둔 곳에 자리를 잡은 이른바 배산임수(背山臨水)의 명당이다. 남쪽으로 탁 트인 하늘과 산,  그리고 앞쪽의 호수와 어우러져 주변 자연과 조화롭다.

그 풍경은 유구한데 정작 비각과 정자각도 사라졌고 또 여러 석물들도 상태가 좋지 않다.

여러 기록에 따르고 또 사진을 보면 돌의 품질이 썩 좋은 것이 아니라서인지 문인, 무인 그리고 짐승 조각품의 형태가 닳거나 떨어져 나간 데가 많다.

 


후릉 근접사진. 경기도 개풍군 흥교면 흥교리(경기도 판문군 령정리) -조선왕릉1 국립문화재연구소 2009

 

후릉의 삼계(三階)와 석물 배치 모습

 

후릉 앞쪽 냇가의 풍경

 

봉분 앞에 놓여진 장명등

병풍석에 조각된 영지와 구름 문양(雲彩)

무인석

문인석

 

비각이 유실된 채 1755년(영조 31)에 세운 "능표석
전서체로 (조선국 정종대왕후릉 정안왕후부좌)

석호(石虎)

 

석양(石羊)

 

정자각이 유실됐지만 뚜렷하게 정자각 초석이 남아있다.

 


 (석물들) 능침 앞에는 중계에 문인석, 하계에 무인석이 각각 석마를 대동하고 있다.
쌍릉으로 조성된 후릉의 석물은 2배수로 설치했다. 이는 태종의 헌릉과 같으며, 석마는 모두 8기가 남아있으나 입,귀 부분이 깨져 파손되어 있다.

(후릉위치) 경기도 개성시 판문군 령정리 / 경기도 개풍군 흥교면 흥교리 소재(현 개성시 판문군 영정리)